자랑스런 한국인 유일한 박사 
출처: http://kr.blog.yahoo.com/chanmbaek/1475822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첫째,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림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 공업고교 학생들의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며 그 학생들이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내 초미리는 딸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다섯째, 아들 유일선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유일한 박사의 가치관
* 기업의 책무 :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 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 배출하며 기업 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그리고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 국가관 :국가(國家), 교육(敎育), 기업(企業), 가정(家庭). 이 모든 것은 순위를 정하기 매우 어려운 명제(命題)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바로 국가ㆍ교육ㆍ기업ㆍ가정의 순위가 된다.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神聖)한 말로 서약(誓約)하여야 한다.
* 기업관 : 기업의 제 1목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한 기업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 성장을 위한 필수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守錢奴)와 다를 바가 없다.
* 인간관 :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휼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휼륭한 사람이다.
이상적인 인간 형성을 위해 근면(勤勉)·성실(誠實)·책임감(責任感)은 바람직한 3대 요소 이다. 약한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 전문 경영인제 : 일제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1938년부터 약 8년간 유일한 박사는 미국에 머물면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 하였습니다. 이때 유한양행은 유명환 사장을 제 2대 사장으로 세워 영업을 지속해 나갔으며 이후로도 유일한 박사가 사장직을
국내에서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세워 기업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1969년 제44기 정기총회에서 제 11대 사장직을 사임하고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동탑산업훈장을
조권순 사장의 목에 걸어줌으로써 사장직과 경영권을 완전히 이양하였습니다.
이로써 유한양행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는 유한킴벌리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 전사원 지주제 : 1936 년 6월 20일, 종업원들에게 액면가 10%의 가격으로 주식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전사원지주제를 도입한 것으로 이와 같은 경영 철학은 애사심 고취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도 사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고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교육 사업 : 유일한 박사는 전쟁 후 폐허가 된 조국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공과기술을 통한 복구 사업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1964년 개교한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전원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정규 고등학교로, 우수한 학생들이 치열한 지원 경쟁을 통해 입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재산의 사회 환원 : 유일한 박사 타계 후 공개된 유언장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식들에게 대물림 하지 않고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두고두고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애국정신, 선구자, 개척자 정신은 유한킴벌리의 기업이념인 ‘소비자가 선호하는 유익한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여 우리나라 위생문화 발전을 선도하고 건강과 복지향상에 기여한다’ 로 이어져 지금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 유한양행 게시판에서 -
한국의 위대한 기부자 - 유일한 박사  
출처: http://blog.naver.com/an2910?Redirect=Log&logNo=150005022983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기부문화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다. 그는 가장 정직하게 기업을 경영하였을 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기업을 성장시켰으며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사회를 위하여 기부하였다. 그는 단순한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사회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실천적으로 보여준 인간 삶의 진정한 스승이자 지도자이다.

우리나라는 유일한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세계에 자랑해야 한다. 그의 기업가 정신과 나눔의 철학은 세계 어느 위대한 기업가나 기부자보다 위대하다. 한국사회는 그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되며 후세의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유일한 박사의 기업가 정신

21세기는 인류 역사상 자본주의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시대이다. 세계화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기업들은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 전세계에서 자본을 축적해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신자유주의나 시장주의라고 칭하고 있다. 아무튼 자본주의가 지닌 구조와 논리는 인류의 발전에 가장 지배적인 위치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의 경쟁논리의 구조 속에서 희생당하고 경쟁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 (실업자, 장애인, 무의탁노인, 어린아이 등)에 대하여 사회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 어느 나라나 정부는 그러한 사회적 책임의 주체이나 오늘날과 같이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화 속에서 정부가 그러한 기능을 다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그러한 책임을 단지 정부만의 책임이 아닌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NGO들이 그러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많은 자원봉사자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사회적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책임과 기업시민정신은 바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

한 기업인으로서 일찍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기업이 함께  사회적책임을 다하며 공존할 수 있는지를 몸소 실천한 이가 바로 유일한 박사이다.

유일한 박사는 당시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원지주제를 (社員持株制) 1936년에 실시하였으며 1962년 주식공개를 통해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함으로써 기업인으로써 이미 선진 경영을 실시하였다. 유일한 박사는 1971년 3월, 별세하기 전에 이미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적 관련이 없는 제3자에게 이양함으로써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단행했다. 이리하여 유한양행의 경영권은 전문경영자 조권순 사장에 의해 계승되고 그 뒤는 또 다른 전문경영자에게 이어져 연만희 회장의 뒤를 이은 김태훈 사장을 거쳐 김선진 사장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유한교육 신탁관리위원회”와 같은 공익재단을 설립하여 교육장학사업 및 사회 사업 실시했으며, 혈연 관계가 없는 회사 간부사원에게 사장직을 인계하는 등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실시하여 1926년 유한양행이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한국 경제계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경영을 하였다. 한국 경제사에서 100년을 가까이 성장해온 기업은 거의 없으니 유일한 박사는 경영인으로서는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몇몇 사람들이 유일한 박사의 경영철학이 유한양행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한계를 가져왔다고는 하나 그들은 한국 경제계에서 1920년대에서 지금까지 유지한 기업이 거의 없음을 볼 때 자신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알아야 한다.

유일한 박사의 생애와 업적

유일한 박사는 1895년1월5일(음력 1894년12월13일) 평남 평양에서 유기연(柳基淵)씨와 김기복(金基福)씨 사이에 6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9세 때 일찍이 선친의 뜻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100여 년 전, 겨우 10 세밖에 안 된 코흘리개 유일한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평양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배에 혼자 올랐다. 큰 나라에 가서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배워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엄격한 말씀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배달, 아르바이트 등 고학을 하며 헤스팅스 고등학교,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너널 일렉트릭 (General Electic Co,)에 회계사로 입사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 (韓人自由大會)"에 참석하고 일렉트릭사를 그만둔 후 대학시절의 친구인 월레스 스미드와 합작하여 1922년에 라초이(숙주나물) 식품회사를 창립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사업상 목적으로 귀국할 당시 유일한 박사는 일제시대 한국 사회는 비참할 정도의 의학계가 낙후하여 철마다 찾아 드는 돌림병과 난무하는 엉터리 의사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각종 기생충, 결핵, 학질, 피부병 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목격했지만 막상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적당한 약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유일한 박사는 일제하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약이 없어 질병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약회사의 설립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1926년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유한양행을 설립한 것이다. 


유일한 박사의 기부활동

설립자 유일한 박사는 평생을 바쳐온 교육장학사업 및 사회원조사업을 보다 항구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되겠다는 결심하에 1970년 개인주식 8만3천여주를 기탁하여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발족시켰으며, 이듬해 사후 유언장 공개를 통해 전재산을 이 기금에 출연하였다.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은 1977년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규정에 따라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소유주식 일부를 유한학원과 분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건전한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기업이윤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되돌려야 한다'는 기업이념으로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선도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이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육, 장학사업에 열정을 다했으며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해외유학생에게 여비를 부담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일한 박사가 유언장을 통해 모든 소유주식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남김으로써 유한양행의 기업이윤은 사회공익사업을 위해 쓰여지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은 1976년 장학 사업 등 사회사업을 위한 공익 재단법인 ‘유한재단’과 우수 기술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법인 ‘유한학원’으로 분리되어 오늘날까지 활발한 사회공익사업을 펼치며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유한양행의 주식은 2005년 현재 유한재단 18%, 유한학원 8%, 기타공익법인이 16% 가량을 소유하고 있으며, 유한양행은 지속적인 고배당 정책을 통해 기업이윤이 사회공익활동에 사용되도록 하고 있다.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유일한 박사가 사망한 후 그의 유언장은 일반인들이 생각하기 힘든 그의 사람과 사회를 위한 철학으로 다음과 같이 적시되어 있었다.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를 마련해 준다.

딸 재라에게는 유한중ㆍ고등학교 안에 있는 땅 5000 평을 물려준다. 이 땅을 유한 동산으로 꾸며 주기 바란다. 단, 유한동산은 학생들이 마음껏 뛰놀며 쉴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치지 마라.

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앞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라. 나머지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모두 한국 사회 및 교육 신탁 기금에 보내, 뜻 있는 교육 사업과 사회 사업에 쓰도록 하라!’ 

유일한 박사는 이 편지를 남긴 채 1971년 3월 11일 일흔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유언 대로 학생들이 뛰노는 ‘유한동산’에 잠들었다. 대재벌이었던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 그리고 손때 묻은 가방ㆍ안경ㆍ만년필ㆍ지팡이가 전부였다.

유일한 박사의 유업 승계-2대에 걸친 기부활동

유일한 박사의 딸 유재라씨는 1991년 3월19일 미국 시애틀에서 63살로 타계했는데, 그녀는 당시 시가 45억원 상당의 유한양행주식 2만5천주와 시가 1백60억원의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집터 1천8백 평 등 모두 2백5억원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연보 

1895년 평양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1904년 아버지의 권유로 10 세 때 홀로 미국으로 건너감
1919년 고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
1916년 미시간 주립 대학에 입학
1922년 라초이 주식 회사 세움
1925년 21 년 만에 가족을 만남
1926년 호미리와 결혼 후 귀국해 유한양행 설립
1953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돌아옴
1964년 학교 법인 유한학원을 창설
1969년 전문 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줌
1971년 유한동산에 묻힘

1977년 유한재단으로 명칭변경하고 주식일부를 학교법인 유한학교로 분할

1991년 유재라 여사 (유일한 박사의 여식) 영면, 전재산 205억원을 유한재단에 유증

 (yh)

애국지사, 독립투사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  ‘맹호군’ 창설 주도, OSS 특수공작대원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후세 기업인들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지만, 일제 말기 한때 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투신했었다는 점에서도, 다른 기업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하던 유일한은 1926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와 ‘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않은 국민만이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 ’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승승장구하던 유한양행은 태평양전쟁과 일제의 탄압으로 위기를 맞는다. 일제의 전시통제 및 수탈정책, 물자총동원 계획 등은 기업활동을 극도로 위축시켰고, ‘조선의약품 기업 정비령’과 군수공장 지정 등으로, 유한양행의 손발은 완전히 묶였다.

특히 일제는 유한양행을 미국계 회사라며 핍박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 간부사원 전원을 종로경찰서에 연행하기도 했으며, ‘양행(洋行)’이 적성적인 표현이라고 해서 상호도 유한제약공업으로 바꿔야 했다. 또 혹독한 세무조사로 끊임없이 회사의 목줄을 조여왔다.

당시 유일한은 미국에 있었다. 1938년 유럽과 남북미의 약업계를 시찰하고 수출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국했다가, 전쟁 발발로 미국에서 발이 묶인 것. 유일한은 남가주대학 경영학석사 과정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민족대회 개최를 주도했고, 1942년 8월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참석,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회장 이승만 및 캘리포니아 주지사 컬벗 올손의 축사를 대독했다.

또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미국 육군사령부로부터 허가를 받고 ‘맹호군’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했고, 위원회 기획연구부 위원장을 맡아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특히 유일한의 항일 독립운동의 하일라이트는 미국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의 특수공작요원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OSS는 중국에서는 광복군을 훈련시켜 낙하산으로 국내에 투입시키는 ‘독수리작전’을, 미국에서는 ‘냅코(NAPKO)’작전을 추진했다. 냅코 작전은 재미 한인교포들로 특수공작대를 구성해 한국에 침투시켜 첩보수집 및 지하조직을 만들어 무장유격투쟁을 벌이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두 작전은 모두 허사가 됐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씨에 따르면, 공작원들 중 8명의 명단이 보안상 A부터 H까지 알파벳으로만 남아있는데, 이중 A가 유일한이다.

OSS 훈련책임자는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고, A에 대해 소개했다.

공작원들은 캘리포니아 산타카타리나섬에서 무기사용법, 폭파훈련, 낙하산침투, 비밀 먹 사용법, 독도법, 무전기술, 촬영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50세의 나이에 이렇게 고된 특수공작원 훈련을 자원해서 받고, 자신의 회사도 무장투쟁에 기꺼이 바칠 각오를 했던 유일한은 기업인이기 이전에 애국지사 , 독립투사 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 2005-08-11] 

청지기 인생을 산 유일한 박사 

“내가 모은 재산은 모두 여러 사람을 위하는 일에 쓰여야 합니다…”

유한양행은 우리나라 기업 역사에 여러가지 뜻깊은 흔적을 남겼다.
철저한 경영의 투명성과 지속적인 사회복지 참여, 재산의 사회환원 등 모범적인 전례를 남겼다.
이것은 요즘처럼 일부 기업들이 흉내낸다고 해서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근본적인 철학이 내재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업의 참다운 모습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회사를 경영하는 내내 사회를 위한 우선순위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전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편집자 주>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손녀 유일링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준다.
2. 딸 재라에게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평을 물려준다.
3. 자신 소유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재산 처리에 관한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한때 유한양행 부사장까지 지냈던 유일선 씨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았다.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혼자 살아가라는 말만 있었다. 또 부인에 관해서는 딸 재라에게 노후 복리를 위해 도와주라고만 했을 뿐 재산을 물려준다는 말은 없었다. 딸 재라에게 땅을 물려준 것도 사실은 상속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가꾸어 줄 것과 주변에 울타리를 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는 유한공고 교정에 묻혀 지하에서나마 마음껏 뛰어 노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Trust Fund For Social and Educational Assistance in Korea)’은 유한공고의 학교재단으로 ‘유한재단’의 전신이다. 후에 이 기금은 ‘유한학원’과 분리되었다. 유일한 박사는 이 재단에 생전에 이미 96,282주를 기증했었다. 이로써 이 재단은 총 237,223주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총주식 96만주 가운데 24%를 소유한 사실상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생전에 연세대학교 재단에 41,000주를 기증했으며, 유한공고에 40,000주, 유한양행 사우공제회에 27,218주, 보건장학회 17,368주를 기증했다. 이들 공익 기관이 소유한 주식 비율은 45%에 달해 유한양행의 소유 형태와 경영 체제를 말해 주기도 한다.

유일한 박사는 특히 연세대학교 재단을 비롯해 각 교육재단에 주식을 기증하며 단서를 붙였다. 즉 의료 복지와 교육을 위한 목적 이외에는 주식을 매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뜻이 사후에도 왜곡되지 않도록 해 놓았다. 그는 단순히 재산을 사회에 돌려준 것이 아니라 기업을 사회에 내놓았으며 그 기업은 지속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혈족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2세 상속이 아닌 전문 경영 체제

유일한 박사는1960년 소사공장에 최신식 설비의 실험연구실을 준공하였으며, 1962년에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공개(株式上場)하여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모범을 보였다. 유일한 박사가 주식을 공개한 직접적인 목적은 “우리나라 기업이 한 두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져 가지고는 발전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참여함으로 해서 회사가 다소 귀찮을지는 모르지만 회사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본이 부족해서 상장한 것이 아니라 주식의 대중적인 소유는 회계의 공개와 함께 기업의 민주화를 의미한다는 차원에서 상장한 것이다.

한편, 유한양행은 ‘모범납세 우량업체’로 인정되어 1968년 대통령으로부터 국내 최초의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1년간 세무사찰의 면제를 받았다. 당시 유력한 월간지에 ‘한국 유일의 자진 납세 업체’, ‘한국 유일의 장부 공개 업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러한 평가는 평소 유일한의 납세보국(納稅報國)의 신념으로 기업을 운영하였던 결과인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1969년에 경영 제1선에서 물러나 후임자에게 기업을 맡기게 되었다. 그는 후계자로 신임 조권순 사장에게 물려주면서 회장직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유일한과 조권순 사이에는 하등의 혈연이나 인척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박사는 50여 년간 걸쳐 쌓아 올린 막대한 기업의 재산 관리권을 아낌없이 물려주었다. 이런 일은 한국 기업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유일한이라고 하여 대를 물려 줄 아들과 딸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즉 아들 유일선(柳逸善)과 딸 유재라(柳載羅)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척 관계가 없는 제3자에게 이양함으로써 일생의 자기 신념을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1971년 3월 76세를 일기로 조용히 타계하였다. 그가 소천한지 이미 30여년이 흘렀으나 경제난맥을 넘고 있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되새겨야할 기업인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유일한 박사 어록

인간관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휼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휼륭한 사람이다.
▷이상적인 인간 형성을 위해 근면(勤勉), 성실(誠實), 책임감(責任感)은 바람직한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급하지 않은 성격까지를 구비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약한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특히 외국인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실패, 그것으로 해서 스스로 나의 존재가치를 깨닫는다면, 실패 그것은 이미 나의 재산인 것이다.
▷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보는 연령이 되면 누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평범한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너무나도 부족한 점이 많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기업관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연마(硏磨)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되는 것이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守錢奴)와 다를 바가 없다.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양질.염가의 제품 생산, 이것은 기업 성취의 ABC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기업과 개인적 정실(情實-비록 그것이 가족의 경우라도)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요, 또한 기업을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다.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 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
▷돈을 벌어야만 하는 사람과 돈을 써야만 하는 사람이 만나서 일체가 되어 일을 할 때, 거기에 창조적 작업이 이루어진다.
▷기술자가 되려면 자기가 하는 일에 흥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또 정확히 하여야 한다.
▷정직(正直) - 이것이 유한(柳韓)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
▷기업으로 해서 아무리 큰 부(富)를 축적했다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 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 있지 아니하는 법이다.

아들에게,
법률학교가 점점 좋아지고 있고, 복습이 잘 되고 있고, 법률학교의 기초 코스가 네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서 알게 되니 기쁘구나. 그리고 인생에 대한 너의 생각과 견해에 대하여 네가 행한 대로 내게 편지를 써 주어서 더욱 기쁘구나. 좌절, 지나친 방종,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가까운 사람의 행동,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보상의 결핍 그리고 그 이외에는 하느님만이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 아래 있는 사람들은 가끔 인생에 대해 혼동할 때가 있다고, 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단다.

내가 가졌던 불타는 야망, 대학을 들어가고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의욕들이 나는 한국을 외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야 하며 한국 국민들을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해야겠다는 의욕으로 불태웠단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가졌었단다. 그리고 네가 제시한 이러한 것들을 이루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단다. 사람들은 야망이나 욕구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시킬 특별한 것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에 내 경험을 여기서 말한 것 같구나.

“당신은 타인의 목적을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라”는 너의 인생관은 너에게 만족감을 가져다 줄 것이며, 나에게도 물론 가장 근본이 되는 인생관인 것 같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우리가 타인의 유용한 목적을 위하여 소용되어 질 때 스스로가 행복함을 느낄 것 같구나.

우리 가족은 서로 가깝지 않고, 어려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정도로 너를 잘 이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너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와 네가 이러한 생각들을 몇 년 동안 쭉 해왔다니 이 아버지는 굉장히 슬프단다. 아들아, 아버지 특히 남자는 겉으로 슬품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다른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 사랑과 동료애, 이해심과 그리고 가까운 부자애를 나누고 싶었단다.

우리 가족은 좀 달랐던 것 같구나,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족 넷 모두는 서로가 무척 가까웠는지도 모르겠구나. 다시 말해서 스키피와 나는 서로 상반되는 기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와 제넷처럼 서로 아주 가깝고 친하단다. 나는 측정할 수 없는 너와 제넷의 사랑과 애정에 많이 의존하고 있단다. 나는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만큼 너도 나를 이해해주는 감정을 가지길 소망한단다.

나와 같이 부족함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아들이 더 많은 것을 해주길 바란단다. 하지만 나는 네가 내가 실패한 것들을 메우는데 네 인생을 허비하기를 더더욱 원치 않는다. 만약 한국에서 우리가 네게 사회복구 프로그램을 요청하고 이것이 만약 네 마음속에 있는 열정을 불태울 수 있으며 네 삶의 흥미를 준다면 너는 일상의 고역을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며 완전히 공허한 기쁨이 아닌 인생에서 유용한 삶을 느낄 수가 있을 것 같구나.

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혹은 작은 나라가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든지,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대해서는 분쟁 해결이 불가능한 곳은 없는 것 같다. 한국은 완전히 폐허화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산재한 재건의 기회는 많으며, 제약산업은 좋은 여건을 제공할 수 있으며 1,000여명의 가족에게 희망을 제공할 수 있으며 동시에 건강과 즐거움을 위해 많은 의약품을 필요로 하고 있단다.

그리고 이러한 분야는 훌륭한 사람의 비전과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도전할 수 있는 곳이라 여겨지는구나. 우리는 그러한 계획에 어떤 기회가 있는지 잘 관찰해야 하며,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300,000 이외에 $400,000짜리 재건축을 협상하고 있으며, 레들리(lederle)는 5년 임대 기준으로 한국에서 의약품을 출품하기 위하여 $250,000에 해당하는 원재료를 선적할려고 하고 있다.

한국에서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할 것,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즉 사회 구석구석에 복지나 덜 가진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투쟁 같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귀속시켜야 할 공공사무, 건축가, 출판가와 같은 이들에게는 욕구를 불러일으킬만한 많은 것들이 놓여있다.

편지가 길어지는 구나. 네가 이 편지 내용을 좋아할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은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나는 항상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네가 나와 함께 나누고 싶듯이 나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어주기 바라며 너는 내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며 네가 밖으로 표명하는 것보다 너를 더욱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네 인생의 목표가 너를 어디까지 이르게 할 지는 몰라도 자유를 주고 번거롭게 하지 않았던 때처럼 살고 싶구나.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하고 중요해서 너에 대한 내 우려의 기도가 너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지, 내 생활약식에 대한 나의 회고가 내 삶을 꾸려 나가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구나.


애정을 보내며,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나눔을 실천한 유일한 박사

 

책소개
 
돈을 모으는 것이 기업가라면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조금 색다른 사람임에 틀림없다.
돈을 잘 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아도 죽어야 하는 우리의 일회성의 삶 속에서
올곧고 치열한 삶의 모습을 고민하게 하는 분이다.

탈세와 정치자금이 없는 회사를 만들고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긴 유일한 박사.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로서 21세기를 이끌어갈 진정한 리더십을 생각한다.

 

대학들어와서 처음 읽은책...

평소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와서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며,
어떻게 기업경영을 하였을지 궁금해왔었는데
이책을 통해 유일한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수 있어서 좋았고
돈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렇다. 돈이라는 것은 바로 쓸때 가치가 있는것이며,
기업이라는 것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돈은 많이 버는 것보다는
가치있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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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vintage green s mixing bowl 2008/05/23 0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보를 위한 감사합니다.

  2. BlogIcon jim castillo gay 2008/05/23 06: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는 위치가 우수한 있는다!

  3. BlogIcon natural penis enlargement exercises 2008/05/23 0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의 방문한 위치를 즐기는!

  4. BlogIcon loosing virginity stories 2008/05/24 0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에서 유사한 역사는 이었다.

  5. BlogIcon bag bed butterfly in 2008/05/24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위치는 아니라 유익한뿐 재미있는다!

  6. BlogIcon female hairpulling cat fighting 2008/05/24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아주 지점. 감사.

  7. BlogIcon fetish home movies 2008/05/24 0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걸출한 위치! 많은 감사.

  8. BlogIcon cross dresser video 2008/05/24 0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는 위치를차가운 만들었다!

  9. BlogIcon pine shelf with pegs 2008/05/24 0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위치를 경이롭 위해 많게의 감사!